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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용하는 복사용지를 한 묶음 꺼내 옆면을 바라보면 수백 장의 종이가 거의 똑같은 크기와 두께로 가지런하게 쌓여 있다.

평소에는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지만 과거의 종이 만드는 방법을 알고 나면 꽤 인상적인 모습이다.

전통적인 제지에서는 물에 풀어 놓은 섬유를 사람이 틀로 떠올려 한 장의 종이를 만들었다. 다시 종이를 만들려면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했다. 숙련된 장인은 상당한 속도로 작업할 수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한 장씩 생산하는 방식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이 원리가 달라진다.

종이를 한 장씩 떠내는 대신 물속에 분산된 섬유를 움직이는 망 위에 계속 공급해 길게 이어지는 종이를 만드는 기계가 등장한 것이다.

여기에 목재에서 대량으로 섬유를 얻는 기술까지 발전하면서 종이는 이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규모 생산이 가능한 산업 제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수제 종이는 왜 한 장씩 만들어야 했을까

전통적인 종이 제작의 핵심 도구 가운데 하나는 종이를 뜨는 틀이다.

물을 가득 담은 통에 잘 풀어진 섬유를 넣고, 망이 설치된 틀을 이용해 섬유를 건져 올린다. 물은 망 아래로 빠져나가지만 섬유는 표면에 얇게 남는다.

장인은 섬유가 한쪽으로 지나치게 몰리지 않도록 틀을 움직여 한 장의 형태를 만든다. 이후 젖은 종이를 다른 표면으로 옮기고 압착해 수분을 제거한 뒤 건조한다.

이 과정을 직접 종이 만들기 체험에서 접해 보면 한 가지 특징을 금방 알 수 있다.

종이 한 장을 뜬 뒤에는 다음 한 장을 다시 떠야 한다는 것이다.

수제 종이 특유의 질감과 개성은 이러한 제작 과정에서 나온다. 하지만 책과 신문, 행정 문서처럼 종이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영역이 성장하면서 생산성은 중요한 문제가 됐다.

제지업자 입장에서는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종이를 일정한 품질로 생산할 방법이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은 의외로 단순했다.

사람이 사용하는 작은 틀을 계속 반복해서 움직이는 대신, 종이를 뜨는 망 자체를 계속 움직이면 어떨까?

이 아이디어가 연속식 제지 기계의 중요한 원리로 이어졌다.

긴 종이를 계속 만드는 기계는 어떻게 등장했을까

제지 기계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프랑스의 **니콜라 루이 로베르(Nicolas-Louis Robert)**가 있다.

로베르는 18세기 말 연속적으로 종이를 생산하는 기계를 개발했고 1799년 프랑스에서 관련 특허를 받았다.

핵심은 기존 수제 종이의 기본 원리를 기계적인 연속 공정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물에 섬유가 분산된 원료를 움직이는 망 위에 공급하면 물은 아래로 빠지고 섬유층은 망을 따라 앞으로 이동한다. 이 젖은 섬유층을 압착하고 건조하면 낱장이 아니라 길게 연결된 종이를 만들 수 있다.

다만 초기 기계가 등장하자마자 오늘날의 제지 공장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로베르의 아이디어는 이후 영국에서 발전했고, 헨리와 실리 포드리니어(Henry and Sealy Fourdrinier) 형제가 기술 개발과 상용화에 투자했다. 기계 제작자인 브라이언 돈킨(Bryan Donkin) 등의 작업을 거치며 연속식 제지 기계는 실용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오늘날에도 움직이는 망을 이용해 연속적으로 종이를 만드는 계통의 장비를 흔히 **포드리니어 머신(Fourdrinier machine)**이라고 부른다.

이 기계의 의미는 단순히 작업 속도가 빨라졌다는 데만 있지 않았다.

종이의 크기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 수 있었다.

‘종이 한 장’에서 ‘종이 한 줄’로 바뀌다

수제 제지에서는 종이를 뜨는 틀의 크기가 한 장의 크기를 결정한다.

반면 연속식 제지 기계에서는 종이가 긴 띠처럼 계속 만들어질 수 있다. 필요한 크기의 낱장은 생산된 종이를 나중에 잘라 만들면 된다.

종이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 셈이다.

오늘날 거대한 제지 공장의 모습을 보면 이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산된 종이는 처음부터 A4 용지처럼 한 장씩 나오는 것이 아니라 넓고 긴 종이 형태로 만들어져 대형 롤에 감길 수 있다.

이후 사용 목적에 따라 폭과 길이를 조절해 자르고 필요한 규격으로 가공한다.

신문용지, 책에 사용하는 인쇄용지, 포장용 종이처럼 최종 제품이 달라도 대량생산에서는 이러한 연속 공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종이의 품질을 일정하게 관리하기에도 유리했다.

두께와 수분, 표면 상태 등을 생산 과정에서 관리하면서 비슷한 특성을 가진 종이를 대량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산 기계가 아무리 빨라져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기계에 넣을 섬유 원료가 충분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종이 원료였던 헌 천은 왜 부족해졌을까

중세부터 근대 초기 유럽 제지업에서는 헌 천이 중요한 원료였다.

특히 리넨이나 삼 등 식물성 섬유로 만든 천을 모아 분류하고 잘게 만든 뒤 처리하면 종이를 만드는 섬유를 얻을 수 있었다.

헌 옷이나 천 조각이 제지업자에게는 귀중한 자원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종이 수요가 계속 증가했다는 점이다.

인쇄 산업이 성장하고 신문과 책, 각종 문서가 늘어나면서 제지업에서는 더 많은 원료가 필요해졌다. 기계를 이용해 생산 능력을 높이더라도 사용할 섬유가 부족하면 종이를 원하는 만큼 만들 수 없다.

헌 천은 공급량을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사용하고 버린 천을 수집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지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이러한 원료 공급 방식은 점점 제약으로 작용했다.

결국 새로운 질문이 등장한다.

주변에서 훨씬 많이 구할 수 있는 재료에서 종이 섬유를 얻을 수는 없을까?

그 대안으로 주목받은 것이 나무였다.

나무가 어떻게 종이가 될 수 있을까

나무와 종이는 겉모습이 전혀 다르지만 둘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종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셀룰로오스 섬유를 나무에서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나무를 잘게 자른다고 곧바로 좋은 종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목재에는 셀룰로오스뿐 아니라 리그닌을 비롯한 여러 성분이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 목재를 처리하고 섬유를 분리하느냐가 종이의 성질에 큰 영향을 준다.

19세기에는 목재를 이용해 펄프를 생산하는 여러 기술이 발전했다.

대표적으로 목재를 기계적으로 갈아 섬유를 얻는 쇄목 펄프 또는 기계 펄프 방식이 있다. 목재를 물리적으로 갈기 때문에 원료를 비교적 많이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리그닌을 비롯한 목재 성분이 상당 부분 남는다.

이러한 펄프로 만든 종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빛과 산소 등의 영향을 받아 누렇게 변하고 약해지기 쉽다.

오래된 신문을 펼쳤을 때 종이가 누렇고 바스러지기 쉬운 모습을 본 적이 있다면 이런 종이의 특성을 떠올릴 수 있다.

반대로 화학적인 방법으로 목재에서 섬유를 분리하는 화학 펄프 기술도 발전했다. 목재 성분 가운데 상당량의 리그닌을 제거하고 셀룰로오스 섬유를 얻는 방식이다.

어떤 펄프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종이의 가격과 강도, 색상, 보존성 같은 특성도 달라질 수 있다.

목재 펄프는 왜 제지업을 크게 바꾸었을까

목재가 중요한 종이 원료가 된 가장 큰 배경 중 하나는 공급 규모다.

헌 천은 사람들이 사용한 섬유 제품을 수집해야 하지만 목재는 산림 자원을 기반으로 훨씬 큰 규모의 원료 공급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제지 기계와 목재 펄프는 서로 잘 맞는 조합이었다.

한쪽에서는 연속적으로 많은 종이를 생산할 수 있게 됐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생산량을 뒷받침할 대규모 섬유 원료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이 변화는 종이의 사용처도 넓혔다.

신문처럼 짧은 기간에 많은 부수를 인쇄하는 매체에는 엄청난 양의 종이가 필요하다. 포장과 광고, 사무 업무가 증가하면서 책 이외의 분야에서도 종이 소비가 커졌다.

종이는 점차 귀중한 기록 재료라는 성격에서 벗어나 일상에서 대량으로 사용하고 소비하는 산업 제품의 성격까지 갖게 됐다.

오늘날 종이를 너무 흔한 물건으로 느끼는 배경에는 이러한 19세기 제지 산업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오래된 책과 신문의 색이 다른 이유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 오래된 인쇄물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차이가 나타난다.

수백 년 된 일부 헝겊 섬유 기반 종이는 예상보다 상태가 좋은 반면, 그보다 훨씬 최근에 만들어진 책이나 신문 중에는 종이가 심하게 누렇게 변한 경우가 있다.

단순히 오래됐기 때문에 나타나는 차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종이의 원료와 제조법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리그닌이 많이 남아 있는 목재 펄프로 만든 종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황변과 열화가 나타나기 쉽다. 종이를 만들 때 사용된 첨가물과 산성도, 이후의 온도와 습도, 빛에 노출된 정도 등도 보존 상태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오래된 책을 볼 때는 출판 연도뿐 아니라 종이 자체를 관찰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종이가 크림색으로 변했는지, 가장자리부터 갈색으로 변하는지, 만졌을 때 쉽게 부서질 정도로 약해졌는지를 살펴보면 그 책에 사용된 재료와 보존 환경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권의 오래된 책은 내용뿐 아니라 그 시대의 제지 기술까지 담고 있는 물건인 셈이다.

종이의 산업화가 우리의 일상을 만든 과정

종이의 산업화는 특정한 기계 하나가 등장하면서 한 번에 이루어진 변화가 아니었다.

먼저 사람이 한 장씩 종이를 뜨던 제지 원리가 기계화됐다. 움직이는 망 위에서 섬유층을 계속 형성하면서 긴 종이를 연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생산 능력이 커지자 충분한 원료를 확보해야 한다는 문제가 더욱 중요해졌다.

헌 천에 의존하던 방식에는 공급의 한계가 있었고, 19세기에 목재에서 펄프를 생산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나무가 제지업의 중요한 원료로 자리 잡았다.

연속식 제지 기계와 목재 펄프의 결합은 종이를 대량생산하는 산업의 기반을 크게 넓혔다.

그 결과 책과 신문뿐 아니라 포장지, 봉투, 광고물, 사무용지 등 종이가 사용되는 영역도 확대될 수 있었다.

오늘날 책상 위에서 부담 없이 사용하는 종이 한 장은 이런 긴 변화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종이가 대량생산되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사람들은 단순히 종이에 글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목적에 따라 종이를 잘라 묶고, 줄을 긋고, 일정한 규격으로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물건이 바로 공책과 노트다.

다음 편에서는 낱장의 종이가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공책과 노트의 형태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줄노트·격자노트처럼 종이 위의 작은 규칙들이 기록 습관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살펴본다.

 

FAQ

Q1. 종이를 연속적으로 생산하는 제지 기계는 누가 만들었나요?

프랑스의 니콜라 루이 로베르가 18세기 말 연속식 제지 기계를 개발하고 1799년 관련 특허를 받았다. 이후 영국에서 포드리니어 형제의 투자와 브라이언 돈킨 등의 기술 개발을 거치며 실용적인 기계로 발전했다. 오늘날에도 이 계통의 장비를 포드리니어 머신이라고 부른다.

Q2. 목재 펄프 이전에는 무엇으로 종이를 만들었나요?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식물성 섬유가 사용됐다. 특히 근대 이전 유럽에서는 리넨이나 삼 등으로 만들어진 헌 천이 중요한 제지 원료였다. 종이 수요가 증가하면서 헌 천만으로 필요한 원료를 확보하기 어려워졌고, 19세기에 목재 펄프 기술이 발전하면서 목재의 비중이 커졌다.

Q3. 오래된 신문은 왜 쉽게 누렇게 변하나요?

종이의 원료와 제조법이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다. 리그닌이 많이 남아 있는 목재 펄프로 만든 종이는 빛과 산소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황변하고 약해질 수 있다. 다만 실제 종이의 보존 상태에는 제조 과정뿐 아니라 온도, 습도, 빛과 보관 환경 등 여러 요소가 함께 영향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