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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을 올려놓고 글씨를 쓰는 일은 지금은 너무 자연스럽다. 메모가 필요하면 작은 수첩을 펼칠 수도 있고, 잘못 쓴 종이는 새것으로 바꾸면 된다. 하지만 종이가 널리 보급되기 전에는 기록을 남기는 일 자체가 지금보다 훨씬 많은 준비를 필요로 했다.
흥미로운 점은 옛사람들이 종이와 비슷한 한 가지 재료만 사용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돌과 점토부터 식물, 나무, 동물의 가죽에 이르기까지 지역의 환경과 기록 목적에 따라 여러 재료가 이용됐다.
오래된 기록물을 살펴볼 때 재료에 관심을 두면 내용만 읽을 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 보인다. 왜 어떤 기록은 수천 년 동안 남았고, 어떤 기록은 거의 사라졌는지 이해하는 단서도 얻을 수 있다.
돌과 점토는 왜 중요한 기록 재료였을까
종이 이전의 기록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돌이다. 돌은 주변에서 구할 수 있고 쉽게 썩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중요한 사건이나 법, 통치자의 업적처럼 오랫동안 보존할 필요가 있는 내용을 새기기에 적합했다.
그러나 돌은 일상적인 메모 도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무겁고 운반하기 불편하며, 글자를 새기는 데에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장을 보러 가기 전에 적는 간단한 메모까지 모두 돌에 새긴다고 생각해 보면 그 불편함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반면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점토판이 중요한 기록 매체로 활용됐다. 젖은 점토는 비교적 부드러워 표면에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 특히 쐐기 모양의 흔적을 찍어 글자를 표현하는 설형문자와 점토판의 조합은 잘 알려져 있다.
점토판에는 행정 기록이나 거래와 관련된 내용뿐 아니라 다양한 문서가 남겨졌다. 일부 점토판은 건조되거나 불에 구워지면서 단단해졌고, 이런 물리적 특성 덕분에 매우 오래된 기록이 현재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여기에서 기록 매체의 중요한 특징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오래 보존하기 좋은 재료가 반드시 편리한 재료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파피루스는 종이와 무엇이 달랐을까
종이의 역사를 찾아보다 보면 자주 만나는 이름이 파피루스(papyrus)다. 겉모습만 보면 종이와 비슷해 보여 파피루스를 최초의 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만드는 원리를 살펴보면 오늘날의 종이와는 차이가 있다.
파피루스는 나일강 주변에서 자라던 파피루스 식물의 줄기를 이용해 만들었다. 줄기 내부를 얇게 잘라 여러 조각을 배열하고 겹친 다음 압착하는 방식으로 기록할 수 있는 표면을 만들었다.
종이는 일반적으로 식물성 섬유를 물에 풀어 섬유질을 분산시킨 뒤 얇은 층으로 떠서 말리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즉 식물 자체를 얇게 펼쳐 사용하는 파피루스와 섬유를 풀어 다시 한 장의 형태로 만드는 종이는 제조 원리부터 다르다.
이 차이를 알고 나면 박물관이나 역사책에서 파피루스 문서를 볼 때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단순히 '아주 오래된 종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당시 사람들이 주변의 식물을 어떻게 기록 매체로 바꾸었는지 살펴보게 된다.
파피루스는 두루마리 형태로 제작하기에도 적합했다. 여러 장을 연결하면 긴 문서를 만들 수 있었고, 필요한 내용을 기록하고 운반하는 데 돌이나 점토보다 유리한 면이 있었다.
나무와 대나무도 글을 담는 도구였다
기록 재료는 지역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종이가 널리 사용되기 이전에 나무나 대나무를 가공한 조각에 문자를 기록하는 방식이 활용됐다.
나무 조각을 이용한 것을 목간, 대나무 조각을 이용한 것을 죽간이라고 부른다. 여러 조각을 끈으로 연결하면 비교적 긴 내용을 순서대로 기록할 수도 있었다.
실제 형태를 떠올려 보면 종이책과는 상당히 다르다. 얇은 종이 여러 장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길쭉한 조각들이 연결된 기록물을 다뤄야 했기 때문이다. 기록량이 늘어나면 부피와 무게도 자연스럽게 증가한다.
이런 차이는 기록의 역사에서 종이가 왜 중요한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종이는 단순히 '글씨를 쓸 수 있는 새로운 표면' 하나가 추가된 사건이 아니었다. 기록을 보관하고 옮기는 과정의 부담을 줄일 가능성을 가진 매체였기 때문이다.
옛 기록 도구를 볼 때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관찰할 만한 부분도 바로 이 지점이다. 재료 자체만 보는 대신 같은 분량의 글을 기록한다면 얼마나 무거웠을까, 어디에 보관했을까, 다른 장소로 어떻게 옮겼을까를 함께 생각하면 기록 매체의 변화가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양피지는 책의 형태와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식물만 기록 재료가 된 것은 아니다. 동물의 가죽을 가공해 만든 양피지(parchment) 역시 오랫동안 중요한 기록 매체로 사용됐다.
양피지는 적절하게 가공하면 글을 쓸 수 있는 비교적 튼튼한 표면을 얻을 수 있었다. 여러 장을 묶어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두루마리뿐 아니라 오늘날 책과 더 비슷하게 페이지를 넘기는 형태의 기록물과도 잘 어울렸다.
물론 제작에는 재료와 노동이 필요했다. 현대의 공책처럼 부담 없이 대량으로 소비하는 물건과는 성격이 달랐다. 그래서 과거의 기록물을 이해할 때는 '무엇을 적었는가'뿐 아니라 '그 내용을 적기 위해 어떤 재료가 필요했는가'까지 함께 볼 필요가 있다.
돌, 점토, 파피루스, 목간과 죽간, 양피지를 차례로 놓고 보면 기록 재료가 단순히 한 방향으로 발전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각 재료에는 내구성, 무게, 제작 과정, 휴대성처럼 서로 다른 장단점이 있었다.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과 기록하려는 내용에 따라 적합한 선택도 달라졌다.
기록 재료의 변화가 보여주는 것
종이가 없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정보를 남겼다. 돌에는 오래 남겨야 할 내용을 새길 수 있었고, 점토는 표면에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재료가 됐다. 파피루스는 식물을 이용해 비교적 가벼운 기록 면을 제공했고, 나무와 대나무도 문자를 담았다. 동물의 가죽을 가공한 양피지는 오랫동안 문서와 책을 만드는 데 활용됐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기록의 역사는 문자만의 역사가 아니라 재료의 역사이기도 하다. 무엇에 쓰느냐에 따라 기록의 양과 보관 방법, 이동 방식까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사용하는 종이는 너무 흔해서 특별한 기술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종이 이전의 기록 재료를 하나씩 살펴보고 나면 얇고 가벼운 한 장의 종이가 가진 의미가 달라 보인다.
이 시리즈의 다음 글에서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종이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확산되면서 중요한 기록 매체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살펴볼 예정이다.
FAQ
Q1. 파피루스와 종이는 같은 것인가요?
같은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파피루스는 식물 줄기의 내부 조직을 얇게 잘라 배열하고 압착해 기록할 표면을 만드는 방식이다. 반면 종이는 일반적으로 식물성 섬유를 물에 풀고 다시 얇은 층으로 형성해 만든다. 외관이나 용도가 비슷한 부분은 있지만 제작 원리가 다르다.
Q2. 종이 이전에는 돌에만 글을 기록했나요?
아니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점토판, 파피루스, 나무, 대나무, 동물 가죽 등 여러 재료가 사용됐다. 어떤 재료를 사용했는지는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자원과 기록의 목적에도 영향을 받았다.
Q3. 오래된 기록 재료 중 무엇이 가장 좋았나요?
한 가지를 가장 좋은 재료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돌은 내구성이 뛰어나지만 무겁고 가공이 어렵고, 비교적 가벼운 재료는 이동과 문서 제작에 유리한 면이 있었다. 기록을 얼마나 오래 보존할 것인지, 얼마나 많이 작성할 것인지, 이동이 필요한지 등에 따라 장단점이 달라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