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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서 같은 책 두 권을 꺼내 나란히 놓아 보면 당연한 특징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같은 판본이라면 글자의 위치와 페이지 구성이 거의 같다. 수백 권, 수천 권을 만들어도 기본적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인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너무 익숙한 일이지만 책을 손으로 베껴 만들던 시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 권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옮겨 적어야 하고, 다음 한 권을 만들려면 다시 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 필사 과정에서 문장이 빠지거나 글자가 달라질 가능성도 있었다.

15세기 유럽에서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 방식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책 제작 환경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그 중심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다.

그러나 인쇄 혁명을 단순히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면서 책이 많아졌다’는 한 문장으로 이해하기에는 놓치는 부분이 많다.

인쇄된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활자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글자를 종이에 찍을 장치와 적절한 잉크가 필요했고 무엇보다 수많은 페이지를 받아 줄 종이의 안정적인 공급이 중요했다.

인쇄술 이전의 책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인쇄술이 확산되기 전 유럽의 책은 주로 필사를 통해 복제됐다.

필사란 기존의 글을 사람이 직접 베껴 쓰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문서 파일을 복사하면 몇 초 만에 똑같은 내용을 하나 더 만들 수 있지만 필사본 시대에는 복제 자체가 하나의 작업이었다.

특히 중세 유럽에서는 수도원 등의 공간에서 필사가 이루어졌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의 전문 필경사와 서적 제작자들도 책 생산에 참여했다.

책 한 권을 만든다고 생각해 보자.

먼저 글을 쓸 재료가 필요하다. 양피지나 종이를 준비하고 필요한 크기로 잘라야 한다. 필경사는 원본을 보면서 한 줄씩 내용을 옮겨 적는다. 책에 따라 제목이나 머리글자를 꾸미고 삽화를 추가하기도 한다. 완성된 낱장을 순서대로 정리하고 묶은 뒤 표지를 붙이는 제본 과정도 필요하다.

따라서 책은 단순히 글을 담은 물건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노동이 결합된 결과물이었다.

필사본을 볼 때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살펴볼 만한 부분은 페이지의 미세한 차이다. 손으로 만든 책에서는 글씨의 형태나 장식, 여백에 남겨진 흔적 등을 통해 제작자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인쇄본에서는 다른 특징이 나타난다.

같은 활자를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고 동일한 페이지를 여러 장 찍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구텐베르크는 무엇을 바꾸었을까

인쇄의 역사가 구텐베르크에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 구텐베르크가 활동하기 훨씬 전부터 동아시아에서는 목판인쇄가 활용됐고 활자를 이용한 인쇄 기술도 발전했다. 한국의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흔히 ‘직지’라고 부르는 책은 1377년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현존하는 중요한 기록물로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구텐베르크를 ‘세계 최초로 인쇄술을 발명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구텐베르크의 역사적 의미는 15세기 중엽 유럽에서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 시스템을 실용적인 형태로 발전시키고 책을 반복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했다는 데서 찾는 편이 적절하다.

인쇄에는 여러 기술이 함께 필요했다.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는 금속활자가 있어야 하고 필요한 글자를 충분한 수량으로 제작할 수 있어야 한다. 활자를 한 페이지의 문장으로 배열한 뒤에는 쉽게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해야 한다.

활자 표면에 사용할 잉크도 중요했다. 손으로 글씨를 쓸 때 사용하는 잉크와 활자 표면에 묻혀 압력을 가해 찍어 내는 잉크에는 요구되는 특성이 달랐다.

마지막으로 활자와 종이를 일정한 압력으로 접촉시키는 인쇄 장치가 필요하다.

이처럼 인쇄술은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활자 제작, 조판, 잉크, 압력 장치와 종이가 결합한 기술 시스템에 가까웠다.

종이가 없었다면 대량 인쇄가 가능했을까

인쇄술을 이야기할 때 활자가 주인공처럼 등장하지만 종이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책 한 권을 인쇄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종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300쪽짜리 책 한 권만 생각해도 수많은 인쇄 면이 필요하다. 같은 책을 수백 부 제작한다면 필요한 종이의 양은 급격히 늘어난다.

만약 모든 페이지를 값비싼 양피지에 인쇄해야 했다면 대량의 책을 생산하는 부담은 훨씬 컸을 것이다.

15세기 유럽에서는 이미 여러 지역에 제지업이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앞선 글에서 살펴본 파브리아노와 같은 제지 중심지가 성장했고 종이는 상업과 행정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즉 유럽의 인쇄술은 아무것도 없는 환경에 갑자기 등장한 기술이 아니었다.

종이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기반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인쇄 기술이 발전했고, 두 요소가 만나면서 책을 더 많이 복제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됐다.

이 관계를 보면 기술의 변화가 한 가지 발명품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스마트폰도 화면이나 배터리, 반도체, 통신망 중 하나만으로 만들어질 수 없듯 인쇄된 책 역시 활자 하나만으로 탄생할 수 없었다.

필사본과 인쇄본은 무엇이 달랐을까

필사본과 인쇄본의 가장 분명한 차이는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이다.

필사는 사람이 원본을 보며 직접 글을 옮긴다. 따라서 새로운 한 권을 만들 때마다 다시 쓰는 과정이 필요하다.

인쇄에서는 한 페이지의 활자를 한 번 조판해 두면 같은 면을 여러 장 반복해서 찍을 수 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제작 속도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다.

같은 판본을 여러 부 인쇄하면 서로 멀리 떨어진 독자들이 상당히 비슷한 형태의 텍스트를 접할 수 있다. 페이지의 내용과 글자 배열을 반복해서 재현하기 쉬워졌기 때문이다.

물론 초기 인쇄본이라고 해서 오늘날 공장에서 나온 책처럼 모든 부분이 완전히 동일했던 것은 아니다.

인쇄 과정 중 수정이 이루어질 수도 있었고 책을 구매한 뒤 별도로 장식하거나 제본하기도 했다. 초기 인쇄본에는 손으로 색을 칠한 머리글자나 장식이 들어간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새로운 인쇄 기술과 기존의 수작업 문화가 한동안 함께 존재했던 것이다.

이 모습은 이전 편에서 종이와 양피지가 공존했던 과정과도 닮아 있다.

기록 매체의 역사는 어느 날 하나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완전히 자리를 차지하는 방식보다 기존 방식과 새로운 방식이 겹쳐지는 과도기를 거치는 경우가 많다.

초기 인쇄본에는 페이지 번호도 없었을까

오늘날 책을 펼치면 당연하게 여기는 요소들이 있다.

제목 페이지가 있고, 페이지마다 번호가 있으며, 장과 절이 구분된다. 책에 따라 목차와 색인도 붙는다.

하지만 초기 인쇄본의 형태가 처음부터 현대의 책과 완전히 같았던 것은 아니다.

15세기에 만들어진 초기 인쇄본을 흔히 **인큐나불라(incunabula)**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유럽에서 1500년까지 인쇄된 초기 인쇄 서적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초기 인쇄업자들은 오랫동안 익숙했던 필사본의 모습을 상당 부분 이어받았다.

글자의 모양도 필사본에서 사용되던 서체를 닮은 경우가 있었고, 인쇄 후 사람이 직접 장식을 추가하기도 했다. 오늘날 익숙한 제목 페이지나 페이지 번호 같은 구성 요소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발전하고 정착했다.

이 변화는 새로운 기술이 기존 문화를 어떻게 흡수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미 책이라고 인식하는 익숙한 모습에서 출발한 뒤 인쇄에 적합한 형식으로 조금씩 변화한 것이다.

인쇄소에서는 종이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완성된 책만 보면 인쇄 과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초기 인쇄소를 하나의 작업 공간으로 상상하면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좀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먼저 인쇄할 원고가 필요하다.

식자공은 필요한 금속활자를 골라 문장과 페이지를 구성한다. 활자를 거꾸로 배열해야 최종 인쇄물에서 글자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타난다.

조판이 끝나면 활자를 단단하게 고정하고 표면에 잉크를 묻힌다. 그 위에 종이를 놓고 인쇄기로 압력을 가하면 한 면의 내용이 종이에 찍힌다.

인쇄된 종이는 건조와 정리 과정을 거친다.

책은 큰 종이에 여러 페이지를 배치해 인쇄한 다음 종이를 접어 페이지 묶음을 만드는 방식으로 제작할 수 있다. 이 묶음들을 올바른 순서로 배열하고 꿰매고 제본하면 비로소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책의 형태가 된다.

이 과정을 알고 나서 책의 가운데를 살펴보면 종이가 접히고 묶인 구조가 눈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평소에는 내용만 읽고 지나치지만 책 자체도 오랜 제작 기술의 결과물인 셈이다.

종이와 인쇄술은 기록의 규모를 바꾸었다

인쇄술의 확산을 ‘책이 갑자기 모든 사람에게 보급된 사건’으로 설명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책을 구입할 경제적 여건과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에는 여전히 차이가 있었다. 종이와 인쇄술만으로 문해력이 자동으로 높아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변화의 방향은 분명했다.

필사에서는 책 한 권을 추가로 만들기 위해 상당한 필사 노동을 다시 투입해야 했다. 인쇄에서는 조판을 마친 뒤 같은 페이지를 반복해서 찍을 수 있었다.

책의 복제 규모가 달라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책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되면 자연스럽게 종이의 수요도 커진다. 제지업자는 더 많은 종이를 공급해야 하고 인쇄업자는 종이를 구매해 책을 만든다. 만들어진 책은 상인과 유통망을 통해 다른 도시로 이동한다.

이렇게 보면 인쇄술의 역사는 제지업, 인쇄업, 서적 판매가 연결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책이 점점 많이 만들어지면서 종이에는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종이를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을까?

책의 대량 생산은 종이 자체도 변화시켰다

15세기의 인쇄 혁명 이후 유럽에서 인쇄물은 계속 증가했다.

책뿐 아니라 전단, 행정 문서, 상업용 인쇄물 등 종이를 필요로 하는 영역도 넓어졌다. 기록과 인쇄가 증가할수록 제지업 역시 더 많은 원료와 높은 생산성을 요구받게 된다.

하지만 당시 유럽의 제지업에서 중요한 원료였던 헌 천은 무한정 얻을 수 있는 자원이 아니었다.

종이 소비가 증가하면서 원료 확보는 점점 중요한 문제가 됐다.

이 문제는 훗날 제지 기술이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원료를 찾는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특히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목재를 이용한 펄프 생산이 발전하고 기계식 제지가 확대되자 종이의 생산 방식은 또 한 번 크게 변한다.

우리가 오늘날 흔하게 사용하는 신문지나 복사용지 같은 대량생산 종이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바로 이 변화가 중요하다.

종이의 역사는 여기서 수제 종이의 시대를 지나 공장에서 대량으로 종이를 생산하는 시대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다음 편에서는 종이를 손으로 한 장씩 뜨던 방식에서 연속적으로 생산하는 제지 기계가 등장한 과정, 그리고 헌 천 중심의 원료가 목재 펄프로 변화한 이유를 살펴본다.

 

FAQ

Q1. 구텐베르크가 세계 최초로 인쇄술을 발명했나요?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동아시아에서는 구텐베르크 이전부터 목판인쇄와 활자 인쇄가 사용됐다. 한국의 직지는 1377년에 금속활자로 인쇄됐다. 구텐베르크는 15세기 유럽에서 금속활자와 인쇄 장치 등을 결합한 인쇄 시스템을 발전시키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Q2. 인쇄술이 발달하는 데 종이가 왜 중요했나요?

책을 여러 부 인쇄하려면 많은 양의 기록 재료가 필요하다. 당시 유럽에서 종이 생산 기반이 이미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쇄업에서 필요한 재료를 공급할 수 있었다. 인쇄 기술과 종이 생산 기반이 결합하면서 책을 이전보다 큰 규모로 복제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됐다.

Q3. 인쇄술이 등장하자 필사본은 바로 사라졌나요?

아니다. 초기 인쇄본에는 필사본의 디자인과 제작 관습이 상당 부분 남아 있었고 인쇄된 페이지에 사람이 직접 장식을 추가하기도 했다. 새로운 인쇄 기술과 기존의 필사 문화는 일정 기간 함께 존재하면서 점차 새로운 책의 형태를 만들어 갔다.